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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2 1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이정현 목사 2026-02-01 추천 0 댓글 0 조회 1
[성경본문] 창세기1:1-5 개역개정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성경본문] 히브리서11:1-3 개역개정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621일 창 1:1-5, 11:1-3,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서 사도신경에 대하여 알아봄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사도신경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학습이나 세례를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암송을 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주일 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합니다.

 

그러면 먼저 사도신경이란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은 사도들이 만들어 놓은 신앙고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12사도가 한 마디씩 고백한 것을 모아 둔 것이 사도신경이라고 말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은 기독교의 중요한 진리를 제일 간략하게 모아 놓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의 뼈대를 모아 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루터는 사도신경은 단순한 사람이 고안해 놓은 것이 아니라 마치 꿀벌들이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부터 꿀을 모아오듯이 위대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주기도문이 모든 기도문 중의 근본이요 또 십계명이 모든 율법의 근본인 것처럼 사도신경은 기독교 신앙고백의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신앙고백을 사도신경이라고 하는 것은 사도시대 때부터 믿었던 신앙고백이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이 이런 형태로 사용했던 신앙고백을 우리가 그대로 사용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도시대 때부터 이렇게 믿었다는 뜻입니다. 사도 때부터 이렇게 믿었지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형태로 명문화된 것은 주후 710년 교회가 텍스터스 리셉터스”(Textus Receptus), 공인된 문서라는 것을 발간했는데 거기에 실리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그러나 훨씬 이전부터 사도신경에 있는 내용들은 신앙고백으로 사용되었고 세례와 입교시 고백하도록 했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 받을 때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까?” “예수님이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는 것을 믿습니까?” 이런 식으로 묻고 답을 함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러니 거의 초대교회 때부터 사용되던 내용들이 점차 하나의 고백으로 묶어졌고 교회에서 사용되다가 주후 710년에는 교회에 공식적인 문서로 발표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다음은 사도신경과 같은 것이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입니다. 성경만 있으면 됐지, 왜 이런 신앙고백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여기에 관해서 첫째는 초대교회에 수많은 이단이 발생하자 기독교의 순수한 진리를 보존하기 위해서 필요했다고 합니다. 둘째는 자녀들이나 새롭게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간결한 형태로 표현한 신앙고백이 필요하게 되었답니다. 셋째는 교회에서 세례를 주고자 하는 성도의 신앙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신앙고백이 필요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필요에 의해서 사도신경이 생기게 되었고 지금까지 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한 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문제는 어떤 하나님을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간단하게,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전능하다는 말은 말 그대로 능치 못하심이 없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고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분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나는 이적들을 볼 때 ! 정말 대단하다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홍해를 갈라지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육지를 걸어가듯이 건넜다거나 여호수아가 기도할 때 태양이 머물렀다는 기사 등은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 편에서는 놀라운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놀라운 일도 대단한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욥기 422-3절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하나님이 능치 못함이 없다는 것과 이루시지 못할 경영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면 그 환경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염려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들을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도록 처리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자녀들에게 외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주신 분이 그 외의 필요를 채워 주시지 않겠습니까? 충분히 주시고도 남음이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은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장에서도 즉,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경과 영적으로 어려운 환경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오는 어려운 환경에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잊지 말고 오히려 그럴 때일수록 온 우주 만물에 대한 절대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바벨론으로 끌려갔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이들을 다스렸던 왕은 느브갓네살이었는데, 이 왕이 큰 금 신상을 세워 놓고 모든 대신과 방백들을 불러 모아 그 앞에 엎드려 절하라고 했습니다. 낙성식에 참여한 모든 사람은 절을 하였으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은 비록 노예였고 왕의 명령을 어기면 어떻게 되는 줄도 알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어길 수는 없었습니다. “너희는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거기에 절하지 말라.” 이 계명을 어길 수 없어서 왕의 명령을 거역했던 것입니다.

 

왕이 직접 찾아와서 다시 한번 더 기회를 주었지만 여전히 이 세 사람은 금 신상 앞에 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왕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겠다고 했으나 다니엘의 세 친구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3:16-18). 느브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평소보다 풀무불을 7배나 더 뜨겁게 하여 이들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뜨거운 불꽃 중에서도 머리카락 하나도 다치지 아니하고 피부색깔하나 그을리지 아니하고 온전히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 놀라운 이적을 두 눈으로 똑바로 지켜보았던 왕이 후에 전국에 이런 조서를 내립니다.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이르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그가 그의 천사를 보내사 자기를 의뢰하고 그들의 몸을 바쳐 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 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3:28).

 

이들은 환경 때문에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럴 때라도 세상에 대한 절대 주권자 하나님, 바벨론까지 통치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럴 때, 풀무불 속에서도 구원함을 받아 살아계신 하나님을 바벨론에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2. 나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 번째 신앙고백입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성경 창세기 1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참으로 놀라운 시작입니다. 세상의 어떤 책이 이런 장엄한 서언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을 믿을 때 성경의 그 다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할 때 성경의 다음 부분을 읽어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할 때 이것은 눈에 보이는 세계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만드셨음을 뜻합니다. 천사의 세계, 영의 세계도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에 속합니다. 천사도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 이전에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천사 창조를 창세기 1장에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천사 또한 피조물이요 천지를 창조하시던 중에 지었음이 분명합니다.

 

우주가 우연히 생겼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보 중에서 바보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는 상식으로도 우주의 오묘함을 말로 다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주가 얼마나 넓습니까? 지구에서 달까지 빛의 속도로 1.2초 걸리는데 우주 끝까지 빛의 속도로 가려면 200억 년이 넘게 걸린다면 이 온 우주의 광활함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천체 망원경이 발달해도 발견하지 못한 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은하계라고 하는데 우주에는 이 은하계와 같은 우주가 얼마나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 넓은 우주의 별들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움직이고 있습니다. 서로 당기면서 그 힘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컴퓨터도 그 힘의 역학관계를 다 계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지구가 태양에서 조금만 가까워도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다 타서 죽었습니다. 조금만 멀었으면 다 얼어 죽었습니다. 지구와 태양의 적당한 거리, 이것이 어떻게 저절로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구는 23.5도 기울어져 있습니다. 지구가 기울어졌다고 하니 우스운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느 장학사가 초등학교를 방문해서 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과학실에 들어갔는데 마침 한 학생이 신기한 듯이 지구본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습니다. 장학사가 학생에게 다가가서 지구본이 왜 한쪽으로 기울어 있지?”라고 물었습니다. 학생은 놀라서 제가 안 그랬어요.”하고는 얼른 교실을 나가버렸습니다. 장학사는 실망하여 옆에 있는 한 교사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사는 그거 사올 때부터 그랬어요.”라는 대답을 했습니다. 장학사는 기가 막혀 교장 선생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교장 선생은 그거 국산품이라 그래요.”라고 대답했답니다.

 

지구는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위쪽을 비추었다가 아래쪽을 비춥니다. 위쪽을 비출 때 우리는 여름이고 아래쪽을 비출 때 남반부가 여름이 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 이야기로는 만약 지구가 23.5도 기울지 않았다면 적도만 계속 비추게 되고 그렇게 되면 적도 쪽의 수분만 자꾸 증발해서 적도 쪽이 오목하게 되었다가 결국 지구가 두 동강이 났을 뻔했다고 합니다. 지구가 23.5도 기울도록 된 것, 그것도 정확한 것입니다.

 

하루가 24시간인 것, 이것도 정확하고 오묘한 것입니다. 하루가 48시간쯤 되면 낮이 더 길어져 여름에 더워서 죽고 밤이 더 길어지면 겨울에는 전부 얼어 죽습니다.

 

지구에는 위성으로 달이 있습니다. 바다의 조수는 달의 인력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만약 달과 지구가 조금 더 가까웠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조수가 거대한 규모로 일어나서 하루에 두 번 낮은 곳은 전부 바다에 잠기게 됩니다.

 

지구 주위에는 대기권이 있습니다. 수많은 운석이 지구에 들어옵니다만 대기권에서 전부 불타버립니다. 그것이 별똥별입니다. 그런데 만약 대기권이 조금만 더 엷었더라면 별똥별이 하루에도 수백만 개씩 지구에 그대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지구는 벌써 멸망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야말로 정확합니다. 어쩌다가 우연히 정확하게 되었겠습니까?

 

우연히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은 생명도 우연히 생겼다고 합니다. 어쩌다보니 생명도 생겼고 어쩌다보니 작은 미생물이 점점 진화해서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여기 강대상이 있습니다. 이 강대상을 두고 어쩌다보니 수백만 년이 지나는 동안 나무들이 들러붙었고 어쩌다보니 위는 평평하게 되었고 어쩌다보니 바람에 깎여서 다리가 되었고,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런 모양의 강대상이 되었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면 요즈음 원숭이는 왜 사람이 되지 않습니까? 무슨 북경인, 네안데르탈인은 기독교를 믿는 과학자가 쓴 책을 보니까 전부 가설이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의 화석이 있는 것이 아니라 뼈 한 조각을 가지고 추정하는데 그것이 사람 뼈인지, 원숭이 뼈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한동대학교의 총장을 역임하신, 김영길 박사가 아주 재미있는 연구발표를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이 우주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아미노산으로 되었다. 그런데 아미노산이 단백질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연히 합쳐질 확률은 10130승 분의 1이다. 또 이 아미노산과 단백질이 모두 합쳐져 하나의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 즉, 아메바가 될 확률은 101,676,260승 분의 1이다. 결국 진화는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연구발표를 들은 미국의 진화론자 카플린 박사는 생명을 형성할 수 있는 확률이 이 정도라면 창조자 없이는 생명이 생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창조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고 진화론은 과학적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과학적이라는 말 앞에 기가 죽습니다. 진화론이 과학적인 것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모르니까 그렇게 추측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는가 추측하는 것이지, 과학적으로 증명된 이론이 아닙니다. 지금 미국 안에 있는 상당수의 주에서는 진화론만 가르치지 않습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을 함께 가르칩니다. 어떤 주에서는 아예 진화론을 가르치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하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진화론을 믿으면 사람은 동물입니다. 생각해 보면 진화론을 믿으니 사람이 동물처럼 사는 것입니다. 동물처럼 싸우고 동물처럼 성행위하고 동물처럼 죽습니다. 진화론을 믿는다면 이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동물과 같기 때문입니다. 진화론을 말하면서 사람의 정신, 영혼을 말하는 것도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원숭이에게 없는 영혼, 정신이 어떻게 사람에게 있을 수 있습니까? 그렇잖아요.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라면 사람에게도 영혼, 정신, 이성은 없습니다. 그러니 진화론을 믿으면서 인생의 가치를 말하는 것 자체가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때만이 인생의 가치를 알 수 있고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때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십니다.

 

3. 그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이심을 믿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를 말합니다.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바로 그분이 나의 아버지라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신앙고백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해도 그 분과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내게 두려움과 공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니 나의 모든 것을 아시고 내가 잘못한 것도 아시기 때문에 나를 벌주실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신다는 말은 위와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어렵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항상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아버지란 먼저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이 사상은 더욱 강했습니다. 아버지는 한 가정의 주인으로서 가정에서 왕이요 선지자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정을 다스리고 주관했고 자녀들을 축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이 친히 나를 다스리시고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029절과 30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10:29-30)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이렇게 철저하게 주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허락 없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납니다. 분명한 것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 허락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다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참으로 다양하고 오묘합니다. 이것을 믿고 이 믿음 안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 관계의 가장 큰 강조점은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셔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이 사랑은 지상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시는 것과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큰 사랑으로 가장 완전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십니다.

 

여러분,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내 아버지가 되심을 믿습니까? 사실 여기에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말 그대로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게 어떤 어려움이 닥쳐오면 하나님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당한 어려움 앞에서, 하나님이 내게 어떤 존재가 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때로는 모순되고 불합리한 이 세상에서, 괴로움과 슬픔 많은 이 현실에서 하나님이 내게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위대하신 하나님으로 여겨 경배하지만 우리의 현실에서, 세상에서 하나님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디입니까? 과연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나를 사랑하셔서 나의 모든 문제를 책임지시는 아버지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까?

 

믿음이란 이론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추상적인 막연한 개념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은 어려움과 역경 가운데서 구체적으로 그 힘과 능력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우리가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다고 할 때 이 신앙고백이 실제 나의 생활 가운데서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의 신앙고백이 바른 신앙고백이 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엄청난 신앙고백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입니다. 이 놀라운 은총을 누려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다 성령을 모신 자이며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고 하나님께 내 어려운 사정을 아뢸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럴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7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나아가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복을 내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심으로 내가 누리는 복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영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궁중에서 자란 황태자가 어딜 가나 시중드는 사람이 따라다니니까 어린 마음에 갑갑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혼자 뛰기도 하고 놀기도 했으면 좋겠다면서 일곱 살 난 황태자는 저녁에 몰래 평복으로 갈아입고 담을 넘어 궁전을 빠져 나왔습니다. 궁중에서 항상 답답하게 생활하던 황태자는 마음껏 뛰어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깊어진 것을 깨닫고 궁전으로 돌아가려는데 그만 길을 잃어 버렸습니다. 애쓰고 찾아도 더욱 산 속 깊이 들어갔습니다. 산 속을 헤매다가 불빛이 비쳐 나오는 집을 하나 발견하고 찾아가 주인을 불렀습니다. “여보세요, 주인 아저씨 계세요?” 주인이 문을 열고 나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이 밤중에 너는 도대체 누구니?” 아이가 대답합니다. “저는 아무개 입니다.” 그러나 주인은 그 아이를 알 리가 없습니다. 이때 아이가 그런데 제 아버지는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라고 말하자 그때서야 주인이 그 아이를 돌보며 극진히 대접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는 전능하사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 때문에 우리의 신분이 달라졌고 우리가 높임을 받습니다. 그 분 때문에 대접을 받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도신경은 내가 믿는다로 시작됩니다. 말 그대로 사도신경은 내가 믿는 것입니다. 내가 전능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 분이 내 아버지가 되심을 믿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도신경을 강해하면서, 제일 처음에 이 믿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다음의 성구들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믿음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체다.’ ‘보지 않고 믿는 자들이 복이 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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