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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020 25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이정현 목사 20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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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사도행전3:1-26절 개역개정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11.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불리우는 행각에 모이거늘

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17.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리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18.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통하여 자기의 그리스도께서 고난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19.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20.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21.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22.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의 모든 말을 들을 것이라

23.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 받으리라 하였고

24. 또한 사무엘 때부터 이어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 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4225일 사도행전 3:1-26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다.

 

사도행전 1장은 예수님이 지상에서의 사역을 마치시면서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시는 것과 구름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시는 장면과 사도들이 가룟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뽑아 사도의 일을 감당하게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2장에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오순절에 성령 충만을 받게 되고 성령 충만의 결과로 주어진 난 곳 방언으로 복음을 전하자 들은 사람들은 조롱하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그들 앞에서 두 가지 내용으로 설교하는데, 이는 술 취한 것이 아니라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성령이 임하심으로 일어난 현상이라는 것과 이어서 시편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과 재림에 대하여 설명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많은 사람이 회개하여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고 예루살렘교회를 든든히 형성하게 되는 것과 그들의 유무 상통한 교제로 아름답게 신앙생활 하는 부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3장에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걷게 되는 사건과 이로 인하여 베드로가 또 설교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31절에 유대인들의 기도시간이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은 아주 옛날에는 하루를 낮과 밤으로만 이해하다가 포로 이후에 하루를 24시간으로 이해를 했습니다. 그리고 24시간도 저녁부터 다음 날 저녁까지를 말하여 저녁 6시가 0시이고 오전 6시가 12시에 해당이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정해진 기도시간이 있었는데 보통 하루에 세 번씩 성전이나 회당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지금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시간은 언제입니까? 9시라고 했기 때문에 기도시간은 오후 3시를 말합니다. 그들의 기도 시간은 오전 9, 오후 3, 저녁 해질 때였습니다. 주님과 제자들 그리고 경건한 신자들에게 정해진 자신만의 기도시간(공적이든, 사적이든)이 있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에 기도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나만의 기도시간이 있어야 경건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정해진 공식 기도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도 좋고 아니면 개인의 상황에 맞추어 따로 다른 것으로 방해받지 않는 기도시간을 정하고 규칙적으로 기도하는 것도 좋습니다. 무엇인가 얽매이지 않고 자발적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그것이 잘되지 않을 때에는 교회의 기도시간과 장소에 맞추어 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2절에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사람’, 즉 앉은뱅이가 나옵니다. 이 사람의 영육적 상황이 어떠했는지 보시기 바랍니다(3:2-10, 4:22). 우선 육적 상황으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고 남을 의지하여 살던 사람이고 구걸하던 사람이며 40여 세로 참으로 비루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나면서부터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론적 삶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은 소망이 전혀 없는 죄인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영적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먹고사는 데만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이며, 그러므로 구원과 예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던 자였습니다. 이 사실은 베드로가 자기를 보라고 했을 때 무엇인가 얻기를 바라는 자세에서(4-5)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영육적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이 사람이 그 날도 미문이라는 곳에 앉아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도 자기 힘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겨우 나온 것입니다. 사도들이 습관적으로 성전을 찾은 것처럼 이 사람도 습관적으로 매일 성전 문 곁에 나와 있었습니다. 단지 유일한 생계수단인 구걸을 위해서 입니다. 여기의 미문(Beautiful gate)은 예루살렘의 총 8개 문 중에서 동편에 나 있는 것으로 황금문(Golden gate)이라고도 불리는 문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출입하는 문이고 아름다운 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구걸하기에는 길목이 좋은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날마다 나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도하러 성전 안으로 들어가던 베드로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구걸하는 그를 보고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그 거지가 요구하는 대로 금과 은은 줄 수 없었지만 대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거지가 구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준 것입니다.

 

사도들에게 있었던 예수의 이름은 사도들의 생명이었고 동시에 앉은뱅이를 살리는 능력이었습니다. 예수 그 이름은 그분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회복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그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시며 회복의 능력이시며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에게는 있었던 그 이름을 앉은뱅이에게 주게 되었습니다. 그냥 모른 체하고 지나쳐서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그날에는 그냥 지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사도들은 과거에 이 사람을 이곳에서 여러 번 만났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고 난 이후에 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예수 그 이름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서서 걷게 되었습니다. ‘이라는 말이 중요한데, 예수 이름을 주었을 때 지체됨이 없었고 나중에 역사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명령과 동시에 역사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힘을 얻고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는 에스테레오쎄산에서 온 것으로 이것은 다시 이어지는 관절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제까지는 한 번도 발과 발목이 지탱할 수가 없었는데 이제 곧 관절이 이어져서 힘을 얻어 일어서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걷는 정도가 아니라 뛰기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서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걷게 되었고 이제는 뛰기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해 보는 일이고 꿈에 그리던 일을 지금 실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걸음으로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하게 됩니다. 육체적 불구자로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는데 이제 온전하여져서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육체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대단한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를 낫게 하신 분이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았기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얻은 감격을 생각하며, 하물며 영혼의 불구였던 자가 완전히 깨끗해졌다면 그 기쁨과 감격의 정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말 그대로 기뻐 뛰며 춤을 추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구속의 은혜에 날마다 감사하며 “17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3:17-18)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 배후에 계신 분임을 잊지 말고(1:17) 그 하나님께 항상 감사와 찬송을 드려야 합니다. 이사야가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라”(35:6)고 하신 예언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본 장의 두 번째 문단은 1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입니다. 장소가 앞부분과 다르게 나옵니다. 성전 미문에서 이제 솔로몬의 행각으로 옮겨집니다. 이 솔로몬의 행각은 이방인의 뜰 동편에 위치 해 있었습니다. 이 행각을 솔로몬의 행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전에 솔로몬이 지은 성전의 기초가 남아 있는 곳에 이 행각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이 행각에서 한 번 제자들을 가르치신 적이 있으십니다(10:23). 이 행각에 모인 회중들에게 베드로가 설교를 합니다. 군중들이 자기에게 관심과 주의를 보일 때 그 주목의 대상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립니다.

 

이것은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입니다(3:12-26). 12절은 이 설교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좋은 설교의 서론은 청중의 주의를 끌고 필요성을 제기하고 청중을 그 다음 주제(또는 본론으로)로 인도해야만 합니다. 이 한 구절은 서론으로서 합당한 내용이 담겼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중심 메시지는 베드로의 첫 번째의 것과 그 구조와 내용이 비슷합니다. 중심은 구약을 인용하여 예수의 구주되심과 회개를 통한 영접을 권고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1)유대인의 범죄를 지적함과 동시에 예수가 구주이심을 선포합니다(12-16). ‘이 사람을 낫게 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이 그를 통하여 역사하여 이 사람을 강건하게 한 것이다. 너희가 십자가에 넘겨준 그 사람이다. 빌라도는 놓아주기를 원했으나 너희는 그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자를 놓아줌으로, 대신 그를 십자가에 죽였다(참고, 23:12-25).’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으니 이 일에 우리가 증인이다. 이 앉은뱅이가 걷게 된 것은 너희가 십자가에 내어준 그분의 이름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으로 완전히 낫게된 이 사람이 지금 너희 앞에 서 있다고 말합니다.

 

2)유대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17-19). 사도는 말을 바꾸어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죄를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한 줄 안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죄 없이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새롭게 되는 날(유쾌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저를 넘겨주었고 너희가 부인하였고 너희가 죽였고 예수님을 해한 너희의 죄에서 이제 돌이키라고 하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의 과정이 필수임을 베드로는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회개함으로 새롭게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3)언약의 성취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합니다(20-26). 베드로 사도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오리라고 하신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모세를 통하여 나 같은 선지자 하나로 예언이 되었으며(18:14-18) 사무엘 이후 수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서도 예언이 되었으며 또한 아브라함을 통하여서도 약속된(12:1-3) 그 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신 것처럼,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35:6)라는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지금 이 사람에게 이루어졌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너희들이 그분의 말을 경청하고 그를 믿고 살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예수님(나 같은 선지자)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멸망 받을 것이나 그분의 말씀을 경청하는 사람은 다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바로 너희는 그 선지자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을 것이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나(18:15, 19) 헬라어의 단어는(3:22-23) 단지 사람의 귀로 청각적인 신호를 받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곧 순종을 전제로 한 들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메시아가 그 백성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반드시 경청하여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자는 멸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멸망한다는 것은 곧 그의 백성에서 잘려 나간다’(cut off)는 의미입니다.

 

사도는 마지막 부분에서 당신들은 그 선지자의 오심으로 복을 받아야 할 자들로서 예언되었다(25-26)’고 말합니다. “25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과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26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먼저 그들에게 메시아를 주심은 그들로 하여금 그 악을 버리게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12절부터 시작된 베드로의 이 설교의 중심은 예수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두 번째 설교에서도 예수만을 높이며 자랑하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중심이 예수였기 때문에 설교의 중심도 예수였던 것입니다. 나면서 앉은뱅이 된 사람을 낫게 하고도 자기의 공로라고 주장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이 하셨다고 말하며 그분만을 높이는 사도의 태도는 작은 것 하나 해 놓고 크게 부풀려 내가 했다고 자랑하기를 좋아하는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됩니다.

 

결론

 

앉은뱅이를 낫게 한 분은 베드로가 아닌 예수님이었습니다. 부활 승천하신 그분이 사도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입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참 기쁨을 주시고 그를 온전히 회복시켜 주실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을 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를 온전히 회복시킬 수도 없습니다. 21절에 나타난 회복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단어이지만 그 중요성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전 수리새 하늘과 새 땅’, ‘영적 도덕적 회복’, ‘포로에서의 귀환’, ‘유산의 반환’, ‘건강을 되찾는 것에 사용이 되는 것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베드로의 설교의 중심 내용은 예수님이었다는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설교의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오순절 후 베드로의 설교로 믿는 자의 수가 3,000명이 더하여졌습니다(2:41). 사도행전 3장 설교 후 믿는 자의 수가 얼마나 더하여졌습니까? 남자의 수가 약 5,000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4:4). 120명의 신자가 3000명으로 성장하고 여기에서 5,000명으로 늘어나게 된 것입니다. 믿는 자의 수 즉, 교회가 이처럼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입니다.

 

교회의 수적 증가는 내적 성숙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때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인위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인구를 늘이는 것은 신본주의적인 교회부흥이 아니라 인본주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교회부흥은 내적 성숙의 자연적인 결과여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건전한 말씀 선포와 진지한 경청으로 인하여 내적으로 더욱 더 성숙해짐으로 수적으로도 크게 부흥할 수 있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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