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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12 22 - 어떻게 성탄을 맞이할까? 이정현 목사 2019-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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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마태복음1:18-25절 개역개정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1:18-25, 어떻게 성탄을 맞이할까?

 

대학교수들이 모여서 올해의 사자성어를 뽑았는데, 공명지조(共命之鳥)라는 말입니다. 공명지조는 어느 한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 같이 생각하지만 그러다간 모두 죽고 만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수신문은 15일 전국의 대학교수 1,046명을 대상으로 한 올해의 사자성어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대학교수 347(33%)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를 꼽았습니다. 공명지조는 불교경전에 나오는 새입니다. 이 새는 머리가 두 개인데, 항상 몸에 좋은 열매를 챙겨 먹는 한 머리를 질투한, 나머지 머리가 독이 든 열매를 몰래 먹어버렸습니다. ‘운명공동체인 두 머리는 결국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최재목 교수는 서로를 이기려고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자기도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현재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 들어 이 단어를 선정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올해의 사자성어 2위는 어목혼주(魚目混珠)입니다. 어목혼주는 물고기의 눈(어목)이 진주로 혼동되어, 무엇이 물고기 눈이고 진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대학교수 300(29%)이 어목혼주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택했습니다.

 

문성훈 교수는 올해 우리사회에 가장 큰 충격을 준 사건은 누가 뭐래도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일가에 대한 검찰 수사라면서 대통령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했던 조국과 윤석열 검찰총장 중 하나는 어목이거나 진주일 수 있고, 아니면 둘 다 진주이거나 어목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올해는 무엇이 진짜 어목이고 진주인지 혼동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밝힌 것입니다.

 

교수들이 뽑은 몇 가지 올해의 사자성어를 볼 때, 분명 1년 동안의 우리나라와 국민들이 어떠했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서로 이기겠다고 헐떧고 싸우고 비방하므로, 둘 다 몰락하여 어느 것이 어목이고, 어느 것이 진주인지를 분간하지 못하는, 혼탁한 상황 속에 놓여있다고 보여집니다.

 

어느 것이 참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운 한해였습니다. 서로 비방하고 험담하고, 뭐가 적폐이고 누가 적폐인지를 모를 정도였습니다. 밝은 면이 어디이고 어두운 면이 어디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고, 좌파와 우편의 데모는, 마치 내란이 일어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역적인 갈등, 정치적인 갈등, 경제적인 갈등, 군사적인 갈등, 노사의 갈등, 부자간의 갈등, 양성평등과 성평등의 갈등 등등 사회적으로 갈등의 골이 너무 깊어서, 교회 안에서 조차도 서로 이해하거나 화해가 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영적으로 육적으로 다 피곤에 지쳐있고, 무엇이 해결책인지를 알지도 못한 채, 또 한해를 보내며 암울한 년 말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 낮고 천한 말구유에 오신 겸손한 왕,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로 오사, 화목 제물이 되어주신 메시야를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이럴 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 오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1장 앞부분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족보는 족장과 왕들의 족보이며, 유다 지파의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이 가계를 타고 오신다는 것은, 곧 예언된 분이 오시는 것이며, 왕으로써 세상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제 실제적으로, 구약에 예언 된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 태어나시는 장면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본문을 간단히 해석을 하고 결론 부분에 가서,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과 관련하여, 요셉의 마음과 태도가 어떠했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나심은 이러하니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신적 수동태로 설명되어야 합니다. 이는 땅의 일이나 사람의 일이 아닌, 하늘과 하나님의 일로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에 의해, 이 세상에 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했다는 말에서 약혼은, 옛날 성경에 정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혼과 정혼은 같은 뜻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약혼은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하여 특별하게 분리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결혼과 같은 효력을 지니는 약속으로, 만약 이때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간음죄에 해당이 되고, 남편이 외도를 하면 파혼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약혼 기간에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과부가 되는 것입니다.

 

정혼 한 기간에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성경은 약혼은 했지만 동거하기 전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동거하기 전에 임신한 사실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간음죄에 해당이 되고, 이런 여자는 모세의 법대로 돌로 쳐서 죽여야 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된 아이가,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 천사가 요셉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이미 이런 말씀을 해 주신 것이 있습니다. “30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 말을 들은 마리아가 깜짝 놀라며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고 말했더니, “35 천사가,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고 말해 주셨습니다. 천사의 이 수태고지를 통하여 마리아는 알고 있지만, 아직 요셉은 모르는 상태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요셉은 의로운 사람입니다. 구약의 의로운 사람은 모세의 법을 잘 준수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여자는 부정하다고 하여, 끌어내어 돌로 쳐서 죽이는 게 의로운 것입니다(22:20-21, 23-24). 히브리인들은 사람을 처형하는 방법에는 죄의 경중에 따라서 다음 네 가지의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가장 무서운 죄의 형벌로 돌로 쳐서 죽이는 것이고, 두 번째는 화형이고 세 번째는 단두형이고 네 번째는 교수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본문의 마리아는 가장 무거운 죄인을 다루는 형벌로 돌로 쳐 죽여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여인을 공개재판에 넘기는 게 바른 처사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구약에서 말하는 의로운 차원을 넘어서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여자의 임신 사실을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드러내면 여자와 아이는 비참하게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셉은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이 사실을 따지지도 않았고, 그 누구하고도 이 사실을 의논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가만히 끊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이 ‘...드러내지 아니하고자한 것은 적극적인 결정인데 비해, ‘끊고자 한 것은소극적인 결정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마리아를 공개 재판에 회부하지 않겠다는 강한 결심을 했으나, 그녀와의 관계를 끊고자 한 것은 미온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 의로운 행동은, 오늘 의로우신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의입니다. 불법한 일이라 할지라도, 구약의 의로움을 넘어서서 그 죄를 덮어주고 용서할 수 있는, 신약의 의로운 행동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대편의 죄악을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덮어주는, 의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주님이 내 죄를 드러내지 않으시고, 당신의 보혈로 나를 덮어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의로운 단계까지 나아가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가만히 끊고자 했을 때,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요셉이 이렇게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꿈에 주의 사자가 나타나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사람과 관계하여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을 쓰는 데는 이곳뿐입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는 표현이 많이 나타나지만, 보통 인간과 관계하여 다윗의 자손이라고 쓰는 것은 요셉뿐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요셉의 법적인 아들로 태어남으로, 예수님이 당연히 다윗의 후손이라는 점을 드러내는 것이며, 또한 예수의 탄생은 구약의 예언이 성취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메시야는 성령으로 잉태되었습니다. 다른 남자의 씨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오해를 풀 수 있었고, 마리아 역시 요셉에게 떠뜻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몸에 오신 것은 성령의 능력으로 된 것입니다. 3위가 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으로, 2위가 되시는 성자 하나님이, 여자의 몸-마리아의 태에 잉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육신에 의해서 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어 나셨습니다. 이렇게 부정모혈의 관계에서 태어나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동정녀의 몸을 빌려 잉태케 하심으로, 원죄의 전가로부터 벗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면 모두가 다 죄인일 수밖에 없는데, 예수님은 죄 없는 온전한 인간으로 태어나셔야 하기 때문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입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날 아기의 성별은 남자여야 되고, 그 이름도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아들을 낳는다고 말했고 뿐만아니라 그 이름의 뜻이,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는 구약의 여호수아, 그리고 여호와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약속의 땅이었던 가나안으로 데려갔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신의 백성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에는 선택된 백성의 구속이라는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만인구원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만인구원을 주장하는 듯한 성경구절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선택된 백성 안에서의 모두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선택적 구원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자가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 선택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고( ), 하나님은 예정된 자를 복음을 통하여 부르시고, 중생하게 하시고 양자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야곱은 사랑하시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같은 말씀에 근거하여 볼 때 그리스도의 탄생은 선택된 자기 백성을 위한 초림이고, 그의 죽음 역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누가 자기 백성이고, 그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어떻게 구원하실지는, 앞으로 계속하여 복음서를 통하여 밝히게 될 것입니다.

 

22절과 23절의 말씀입니다.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모든 것은 선지자의 예언을 이루려 하심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중심 내용은 처녀가 잉태한다. 아들을 낳는다.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이것은 메시야가 오시기 이미 800년 전에 예언된 말씀인데, 그것이 여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인간사에는 있을 수 없는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처녀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어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이런 일이 역사 선상에 그대로 일어 난 것입니다. 예언대로 성취가 된 것입니다.

 

다음 마지막 두 구절입니다.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요셉은 주의 사자의 지시에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순종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대로 순종했는데 그의 아내를 데려왔습니다. 마리아를 데려옴으로 사회적 지탄과 반격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그는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천사의 지시대로 따른 것입니다. 또한 아직 약혼 기간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 기간이 되기 전에 데려오는 것은, 모든 일들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자기가 지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요셉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이의 신성을 얼마나 존중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아이가 성령으로 잉태되신 메시야임을 알았기에, 그는 마리아와 성관계를 갖지 않고 그의 신성을 존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났을 때 그 이름을 예수라고 했습니다. 이 명명은 아버지가 천사의 지시에 따라 한 것이며, 난지 8일 만인 할례 때, 처음으로 공적 인정을 받았습니다(2:21).

 

여러분 전설적인 개그맨 구봉서 씨를 잘 아실 것입니다. 오래 전에 저희교회에도 한 번 오셔서 간증을 해 주셨습니다. 그분이 연예인 교회 장로로 섬겼는데, 하루는 후배 한 명을 전도해서 교회를 데리고 갔답니다. 그 사람이 성경 공부를 하는데, 자꾸 처녀 임신과 예수님 탄생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구봉서 장로가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믿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이 성경공부를 할 때마다 물으니까, 구봉서 장로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야 임마, 남편 요셉도 가만히 있는데, 네가 뭔데 자꾸 따져?” 그렇습니다. 하나님께 따져 묻지 않고, 천사의 지시대로 그대로 순종만 했던 것입니다.

 

결론

 

구약에 예언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태어나셨습니다. 이사야가 예언 한 대로 이 세상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아들로 태어나셨던 것입니다.

 

그는 태어나자마자 그가 해야 할 사명이 정해졌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 속에 그가 해야 할 사명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백성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는 우리의 죄 용서를 위하여 오셨고, 우리를 그 가운데서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이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되는 것은, 임마누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 이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잉태하시고, 10개월 동안 어머니 뱃속에 있었고, 태어나셨을 때까지의 일을 다루는데, 이 기간 동안 요셉의 마음과 행동이 어떠했는지를 간단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요셉은 자기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시는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였습니다. 육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는 요셉의 아들임으로, 자기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요셉은 그리스도를 단순한 육적인 아들로 대하였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대하였느냐는 것입니다.

 

요셉은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평소에 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내가 자기와 상관없는 임신을 했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타인의 치명적인 죄라도 덮어주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천사의 계시를 받았을 때, 의의를 제기하지 않고 마리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부부로 같이 살았습니다. 이같은 행동은 그가 자기의 의지적 결단보다 하나님의 뜻에 더 우선순위를 두고 다기의 뜻을 하나님 듯 앞에 굴복시켰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자기 부인을 데리고 와서도 아이를 낳기까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자기의 성적 욕구를 절제하며 살았다는 것이며 또한 예수님의 신성을 존중했다는 의미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의 탄생을 최초로 목격한 사람입니다. 그는 이 땅에 태어나신 메시야를 처음으로 본 사람이고, 처음으로 경배하고 섬긴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맞이한 최초의 성탄을 기뻐한 사람입니다.

 

지금의 성탄은 개인을 타락시키는 계절이 되었고, 정치적인 이용 도구가 되었고, 경제적(상업적) 수단이 되었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선물이나 주고받는 절기가 되었지만, 우리 교회는 성탄의 바른 정신을 회복하고, 진정한 기쁨, 진정한 평화를 누리를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에는 요셉의 마음과 태도와 신앙으로, 성탄을 축하하고 경배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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