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30살 때까지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어머니와 동생들과 함께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음으로, 본격적으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33살까지 갈릴리를 중심으로 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공생애 마지막 1주간은, 주님이 갈릴리를 떠나 유대 땅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왜 오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기 위해 오셨습니다. 오늘 본문 앞장인 마태복음 20장에서, 이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18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 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19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하리니,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마20:17-19). 주님이 이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것은, 죽기 위해서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 올라가신다고 그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자기의 죽음이 어떠할 것인지를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세베대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을 좌의정 우의정의 자리에 앉혀달라고 하며, 정치적인 야욕을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제자들의 마음까지 상처를 받고, 그들의 마음이 갈라지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제자들과 함께 여리고를 지나오시는데, 많은 무리가 따르게 되었고, 그들 중에 맹인 두 사람이, 주님께 눈 뜨기를 간청하매, 주님이 그들의 눈을 어루만지사, 낫게 해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있는,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서부터 벌어지는 사건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본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예수님이 두 제자에게 명하여, 건너편 마을로 가서 나귀와 나귀새끼를 끌어오라고 하셨고, 이 말씀을 따라 제자들이 건너 마을로 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예수님을 모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는 것입니다. 이 때 많은 무리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며, 환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저는 오늘, 세 가지 교훈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귀담아 잘 들음으로 많은 은혜가 되시기 바랍니다.
1. 예수님의 탄생과 사역과 죽음과 부활은, 모두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도 구약에 예언 된 말씀대로, 처녀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태어 나셨습니다. 그분의 탄생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 전 섭리와 계획 가운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가르치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도 전부 예언되어 있었고, 그의 사역을 통하여 계시를 이루신 것입니다. 주님은 하나도 자의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으시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신 분이십니다.
주님이 택자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의 대속제물이 되신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나사, 잠자는 자들의 소망이 되신 것도, 역시 성경대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 나셨다.’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으로 입성하셨는데, 이것 또한 구약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62:11/ “여호와께서 땅 끝까지 선포하시되, 너희는 딸 시온에게 이르라 보라 네 구원이 이르렀느니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 앞에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슥9:9/ “시온의 딸아 크게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니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이 두절의 말씀을 조합해서, 복음서 기자가 이렇게 인용을 한 것입니다.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매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5). 여기의 시온의 딸은 예루살렘 시민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의 시민들아 이 분이 네 왕이시다.’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그 왕은 세상의 왕들처럼 군림하는 왕이 아니라,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고 온유한 왕이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주님은, 이사야서와 스가랴서의 예언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나귀새끼를 타고 겸손한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비록 아직 멍에매어보지 못한 짐승을 타고 입성하시지만, 마지막 날에는 백마를 타시고 승리의 왕으로, 만왕의 왕으로 심판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 역시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모든 예언이 지금까지 다 이루어졌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예언도 100% 이루어질 줄로 믿고, 소망 중에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성도들은,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본받아,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도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고대광실 높은 집에서 태어나신 것 아닙니다. 만인의 사랑과 환영을 받으며 태어나신 것 아닙니다. 평화로운 자주 독립국가에서 태어나신 것도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럽고, 로마의 속국이었고 작고 작은 유대 땅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은 그분의 겸손한 탄생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생활하시면서도 자신에 관하여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서 배우라.’ 그리고 주와 선생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평생토록,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이제 십자가를 지시기 1주일 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에도 세상 군왕들처럼 말을 타고 가지 않으셨고, 수백의 호위 무사들을 거느리고 입성하지 않으셨고, 나귀 그것도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못한, 작은 짐승을 타고 입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그분의 지극한 겸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귀는 그 자체가, 겸손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합니다. 그분은 왕이시지만 세상의 왕들 같지 않은, 겸손한 왕이십니다.
주님의 이 모습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서로 높은 자리에 앉겠다고 말한 제자들의 모습과, 얼마나 차이가 납니까? 주님이 고난을 받고 이제 죽으러 간다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주님의 그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주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겠다고 자리다툼만 했습니다. 얼마나 교만한 처사입니까.
성도들이 왜 교만하고 마음이 완악해 지고 마음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까? 그것은 아마도 지나치게 세속적인 야망과 욕심에 사로 잡혀 살기 때문일 것입니다.
혹시 우리 안에 이 같은 세속적인 야망과 욕심이 일어날 때, 우리는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겸손과 온유를 다시 한 번 더, 배우려는 자세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빌2:3, 8/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빌 2:3)고 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마음이 자신을 낮추신 겸손과 끝까지 순종함이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은 주님을 본받아,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3. 성도들은 어떤 때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주님께 대한 믿음과 충성과 순종을 변치 말아야 합니다.
본문에 보시면 주님이 예루살렘 가까이에 오셔서 제자들보고,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면, 즉시 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조금은 황당하게 들렸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쨌던 나귀와 그 새끼는 주님의 소유가 아니라, 남의 소유이지 않습니까? 그 나귀의 주인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나귀를 끌고 오라고 하셨고, 혹시 주인이 뭐라고 하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주인이 없을 때 끌고 오면 도둑이 되는 것이고, 주인에게 ‘주가 쓰시겠다.’고 합니다.-라고 했는데, 순순히 나귀를 내어주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지-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어쨋던 주님의 그 말씀대로 마을로 가서 보니까, 진짜로 새끼 딸린 나귀가 있었고, 그 나귀와 새끼를 끌고 오려고 하는데, 주인이 나타나서 ‘왜 남의 나귀를 끌고 가느냐?’라고 묻자, 주님이 일러 주신대로 ‘주가 쓰시겠다.’고 한다고 하니까, 그 주인은 두 말하지 않고 자기의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나귀의 주인은 이미 주가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었다고 보여 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그 한마디에, 믿음으로 복종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본문의 내용에서 제자들이 나귀 새끼를 데려오는 방법은, 분명히 상식으로는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그 말씀을 그대로 믿고 순종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실제적으로 나귀가 그곳에 있었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했더니, 주인도 그 나귀를 순순히 내어 주었습니다.
특히 나귀의 주인은 주님을 대하는 태도가, 대단한 믿음으로 반응하고 절대적으로 순종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자기의 재산에 대한 애착과 아까운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것인데, 이 주인은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한마디에, 주님이 정말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아니면 이 제자들이 주님의 제자들이 맞는지 확인도 안 해 보고, 그대로 재산을 내어 놓은 것입니다. 이것은 순종이자 헌신입니다.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행하였고, 동시에 나귀 주인도 주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두 그룹의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 그룹이고, 또한 나귀 주인은, 주님을 위해 헌신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이 그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지금 왕으로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는 것이고,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왕은 왕이되, 겸손한 왕임을 나타낸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타실 나귀새끼의 등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무리들은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폈습니다. 보통 이 같은 행동은 왕을 영접하거나, 왕의 즉위식 때에 보이는 백성들의 열렬한 환호입니다. 실제로 예후가 왕으로 즉위할 때, 똑 같은 방법으로 백성들이 환호했던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왕하 9:13). 결국 백성들의 이 같은 행동은, 예수를 왕으로 환영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주님 앞서 가기고 하고 뒤에 서서 가기도 하면서, 소리를 높여 찬송하였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호산나’는 ‘구하옵나니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은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두 단어를 합해서 쉽게 이 문장을 말한다면, 곧 ‘메시야 만세’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이 당시 여기에 모인 무리들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어느 학자는 유월절 때 보통 예루살렘에 모이는 인파가, 약 270만 명 정도라고 합니다. 엄청난 수가 예수님 앞 뒤에 서서, 메시야 만세를 외쳤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정치적인 메시야로 인정하고, 이렇게 환호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위에 올라, 하루 빨리 이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평화의 왕이며 평화의 메시야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라, 평강의 왕이요 대속주로서의 왕이었음이 들어나게 되었을 때, 이들의 열렬한 환호는 폭도의 저주로 변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십자가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마27: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저희가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더욱 크게 십자가에 목 박으라고 외친 자들이 바로, 지금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의 신앙은 상황에 따라 이랫다 저랫다 하는 변질자들이고, 믿음이 초지일관하지 못했던 군중들 이었습니다.
그리고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과 제사장들과 사두개인들과 장로들은, 민심이 자기들에게서 예수에게 쏠리는 것을 목도하고 나서, 서둘러 살해 음모를 진행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들의 지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들을 선동하여 메시야를 죽이는 사람들이 되고 맙니다. 그 누구보다도 주님을 바로 알고 잘 섬겨야 할 그들이었지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명예와 부가 있었지만, 그들은 전혀 그것으로 주님을 잘 섬기지 못하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이 외에도 10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했다.’는 말에서, 이들이 소동한 이유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무엇을 하실 분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소동하면서 ‘이는 누구냐’라고 하자, 무리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고 합니다. 갈릴리 나사렛은 유대 사회에서는, 가장 낮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에, 사람들에게 무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오신 분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그 시작도 마지막도 세상으로부터 무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아오셨습니다. 결국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이 사람들이, 유월절 참 어린양으로 오신 메시야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결론은 세 가지입니다.
1.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결코 그냥 하늘로 되돌아가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도 주님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하나하나 다 이루어졌던 것처럼, 앞으로 남은 주님에 대한 예언, 특히 재림과 관련된 예언도, 반드시 역사 선상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며 재림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반드시 그 주님은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백마 타고 구름타고 만국의 심판주로 재림하실 것입니다. 소망 중에 믿음 변치 않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2. 주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으로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주님을 본받아, 이렇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겸손해야 은혜를 입을 수 있고, 온유해야 땅을 기업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물리치시고, 완악한 사람은 얻을 것을 얻지 못하고, 오히려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이어령 씨가 쓴 “축소 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이 있는데, 일본인들까지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 자기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 자기들의 참 모습을 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 한 가지를 주장합니다. 일본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일본은 스스로 작아지려고 할 때에 놀라운 일을 해냈고, 커지려고 무리수를 두게 되었을 때는, 패망의 길을 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을 오늘 신앙인들에게 적용시켜 본다면, 성도들이 주님을 본 받아, 스스로 낮아지려고 하고 작아지려 하고 온유하게 살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지만, 높아지려하고 세속적인 욕망을 가지고 커지려고 하면 망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강한 것보다 부드러운 것이 더 오래간다고 합니다. 시편의 말씀에서 “여호와는 겸손한자를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 뜨리시도다”(시147:6)라고 하셨고, 잠언에서는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잠29:23)고 하셨습니다.
소망교회 성도들은 만왕의 왕이시지만 새끼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주님을 본 받아, 겸손하고 온유한 크리스챤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3. 본문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나귀 주인은 주님에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을 뿐만아니라, 자기의 소유를 주님을 위해 내어 드리는 헌신자였습니다. 그러나 종교지도자들과 대다수의 군중들과 주님을 알지 못했던 자들은,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알지도 믿지도 못하고, 결국 그리스도를 배신하고 십자가에 죽이는 자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메시야가 아니라고, 십자가에 죽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제 고난을 받고 십자가를 지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기 위하여,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끝까지 그분을 우리를 다스리시는 왕으로, 다윗의 자손 메시야께 호산라고 찬양하며,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분께 헌신하며 살아가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월이 흐르고 환경이 바뀌어도 끝까지 끝까지, 주님에 대한 믿음이 변치 않기를 바랍니다. 비록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아름다운 믿음의 소유자들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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