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부은바 된 하나님의 사랑(롬 5:1-10)
이정현 목사
20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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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보시면,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나옵니다.
-성부 하나님/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 하나님의 영광(2), 하나님의 사랑(5), 하나님과 화목(10)이라는 말과 연관되어 나옵니다.-성자 예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1), 경건치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6), 죄인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8), 하나님과 원수 된 자들을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10)로 나타납니다.-성령 하나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부은 바 되었다(5).
본문에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과 성품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결국 나 한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성부 하나님이 사랑으로 계획하시고 성자하나님이 이 땅에서 이루시고, 성령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 가운데 적용하여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본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세 가지 요소가 나오는데, 그것이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1,2절에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4장의 중심 내용을 요약하고 있는 말씀), 3-4절에서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고, 소망을 말하고, 그 이후로 사랑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 단어의 관계 속에서 믿음이 소망과 사랑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어야 참 소망이 생기고, 진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우리가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을 통하여, 대단한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1)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다./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1). 화평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더 이상 반목이 없고, 죄가 우리와 그 분 사이를 가로막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새로운 관계가 수립됨으로 우리는 더 이상 심판의 결과를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아래 살게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이런 화평을 가져다주기 위하여, 주님이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2) 또한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즐거워하게 되었다(2). 예)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감....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임재 안으로 인도된다는 것입니다.
3)믿음으로 말미암아 환란 중에도 즐거워하게 되었다./ 환난-인내-연단-소망을 이룬다(3-4).환란 자체를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환란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환란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내/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맞설 수 있는 능력
연단/ 인격-시험의 결과로 인정받는 사람의 내적 특성
소망/ 하나님의 영광의 미래에 참여할 것을 바라보는 것
결국 고난(환난)이 소망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예)다이아몬드를 만들 때, 탄소에 엄청난 압력을 가한답니다. 탄소에 가하는 압력을 고난...거기에서 다이아몬드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소망이 부끄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어진 바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끄럽지 않다/ 낙심시키지 않는다.
부은 바 되었다/
우리 마음에 부어진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죽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연약할 때에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연약함/ 악을 대항하기에 무력하다, 선을 행하기에 무력하다, 스스로 구원할 능력이 없다는 뜻.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의인을 위하여 또는 선인을 위하여 혹 대신 죽는 사람은 있어도 연약하고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는 자가 어디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이런 경건치 않은 자, 악을 대항하기에 무력한 자들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특수하고 탁월함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셨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제는 연약한 자를 넘어서, 죄인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음을 지적함으로, 인간사에는 없는 사건을 취급합니다. 세상사에, 죄인을 위하여 기꺼이 죽고자 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고 했습니다.
*자기의 사랑/ 자기 자신의 사랑(His own love)
*확증하셨다/ 같이 선다, 같이 서서 증명한다는 뜻...하나님이 십자가 옆에 같이 서서, 이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증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온 인류 앞에 증거물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의 표적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주님이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연약할 때, 죄인 되었을 때, 원수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하여 부활하심으로 구원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랍고 엄청난 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부은 바 되었기에, 우리의 소망이 부끄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구약성경 중 호세아서를 읽어보면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호세아 선지자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음탕한 여자 고멜에게 장가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일언반구 대구도 하지 않으시고 그 여자와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과거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바람을 피기 시작합니다. 다른 남자들과 놀아나다가 빚을 집니다. 남편은 그 여자의 빚을 갚아주고 그 여자를 데리고 와서 같이 삽니다. 하루는 또 나가서 바람을 피워서 애까지 임신해서 왔습니다. 그런데도 선지자 호세아는 그 녀를 안아주며 이러지 말라고 타이르고 교훈을 합니다. 그런데도 말을 듣지 않는 음탕한 여자 고멜의 모습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고멜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타락하고 우상숭배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들 마음대로 죄를 지으며 살아도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주시고 안아주시고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 되고 타락한 그 백성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서의 그 사랑이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비유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눅15/탕자의 비유...아버지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 째 아들이 자기의 몫을 챙겨서, 먼 나라로 가 버렸습니다. 그곳에서 여자들과 함께 허랑방탕하게 살아갑니다. 가져갔던 돈을 다 써버리니까 완전히 거지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돼지나 먹는 음식을 먹으며 남의 집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와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고 돌이켜 아버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한편 아버지는 집 나간 아들을 하루도 잊은 적이 없고, 매일 매일 기다리는 것입니다. 노심초사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아들이 힘없이 걸어오는 것입니다. 아버지는 단숨에 달려가서, 그 아들을 안고 입마추고, 신발을 신겨주고 새 옷을 입혀주고, 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돌아온 탕자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도 하지만, 실재로는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에 초점이 가 있는 것입니다. 실패하고 타락하고, 낭비하고 거지도 상거지가 된 아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을 나타내는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하고 죄인이고, 타락하고 원수지간인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들에게 부은 바 되었습니다. 그 큰 사랑을 측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들 중 모성애가 가장 뜨거운 것은 펠리컨입니다.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펠리컨의 희생을 하나님의 사랑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펠리컨의 사랑보다, 더 진하고 넒고 오묘한 그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은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시골교회를 목회하고 있었는데 너무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에, 치즈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하루는 사모님이 도시락에다 시를 쓴 종이 한 장을 넣어주었습니다. 레만 목사님이 일을 하다가 점심식사 시간에, 도시락을 먹기 위해 폈더니, ‘바다가 다 먹물이고 하늘이 두루 마린들’이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레만 목사님은 그 시를 읽고 큰 감동을 받아서 집에 돌아와서 이 찬송시를 쓰고 작곡을 하게 되었답니다.
1.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 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2.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3.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이 사랑은, 하늘을 두루마리로,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사랑은,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습니다. 지속되는 것입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결론
*1)감사..
아들까지 우리를 위하여 주신 하나님이 그 아들과 함께 더 주시지 않겠습니까?....
감사할 뿐입니다...입술로, 몸으로, 마음으로 물질로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2)전파..흘러 보내는 것/ 파이프
큰 관...큰 파이프로부터 그 사랑을 풍성히 받았음-이제 그 사랑을 어떤 파이프를 통해 흘러 보내셔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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